서주일 목사 (행정담당 부목사)

케빈은 내가 오래 전 영어회화 학원에 다녔을 때 만났던 학원강사다.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대다수 미국인 영어회화 강사가 그렇듯 케빈은 미국 중서부의 별 볼 일 없는 대학을 나와서 영어 잘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한국에서 호강하는 그렇고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를 보면 시골출신이라서 그런지 무척 순박해 보였다. 어떻게 보면 좀 더 잘사는 나라에서 온 그보다 한국사람들이 더 약아 보이기도 했다. 케빈에게서는 다른 학원강사에게서 느껴지는 어떠한 거드름이나 교만의 모습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런 케빈은 회화수업 때마다 얼마 전 결혼한 한국인 아내에 대한 자랑을 빼놓지 않았다. 영어 잘 못하는 나도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말끔마다 “뷰티풀!” “프리티..” “I love her.” 이런 식으로 강의 내내 부인에 대한 찬사를 늘어 놓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처음 한국에 왔을 때 강화도에 놀러갔는데, 그곳에서 그녀를 운명처럼 만났다고 했다. 그래서 아내의 나라인 한국도 사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여성과 결혼한 헐리우드 배우 니콜라스 케이지의 말과 왠지 비슷하다.

그는 한국에서 아름다운 아내와 행복하게 살기 위해 이화여대의 한국어 수업을 듣고 있다고 말했다. 케빈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그의 아내는 무슨 동화 속에 나오는 아름다운 공주님이요 왕비님 쯤으로 생각되었다.

개인적으론 케빈을 무척 좋아했고 영어회화의 필요성을 느끼기는 했지만 강의 자체는 별로 재미가 없어서 인내심이 없던 나는 오래 다니지는 못하고 한 달 만에 학원을 그만두고 말았다. 그런데 몇 달 후, 나중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비운의 강아지 메리우스를 데리고 산책을 하다가 전철역 앞에서 우연히 케빈을 만났다. 정확히 말하면 케빈 부부를 만났다. 케빈은 자랑스런 표정으로 그의 아내를 나에게 소개했다. 케빈의 부인을 본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뽀글이 파마머리에 검은 뿔테안경을 쓰고...아무리 쳐다봐도 그가 늘 입에 달고 있던 ‘뷰티풀,’ ‘프리티’ 이런 단어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멀어도 한참 멀었다.

그녀는 시골스타일에다가 완전히 아줌마였다. 결혼했으니 실제로도 아줌마였겠지만... 케빈은 시큰둥한 내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호응이 없어도 전혀 기죽지 않고 여전히 아내를 자랑스러워했다. 그런데 그런 케빈의 모습이 전혀 나빠 보이지 않았다. 그는 부인을 지극히 사랑하는 애처가요, 아름답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제 눈의 안경인데 누가 뭐라든 자기 부인만을 사랑하면 그만 아닌가? 발갛게 홍조 띤 얼굴로 부인을 자랑하던 케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가진 케빈. 그가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부인과 지금도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까? 케빈이 왠지 보고 싶다.♡